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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 촬영사

한국영화촬영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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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 촬영사 (1) 

촬영감독 이성춘

 

 

한국영화촬영감독협회가 발간하는 "영상기술"지 창간호부터 "한국영화 기술발달사"를 써주신 임병호 선배님께 감사한다.

한국영화가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역사적사항들을 선명하게 기술하신 내용을 중심으로  "한국영화전사", "한국영화재료사진"을 

참고로 그동안 발전해온 우리영화의 촬영사적인 과정을 정리해 본다.

 

◦영화의 탄생

영화의 탄생은 1895년 2월 10일 프랑스 사람 "르이.르미엘"과 "오귀스트.르미엘"이 시네마토그래프를 발명해서 특허를 얻은데서비롯된다.이 씨네마토그래프(Cinematogiraphe)는 (르미엘 공장의 공원들의 원동)이라 부르는 1권 짜리를 1895년 3월 22일 "리웅"의 국산장녀관에서 발견한 것이다.

이것은 사진광학에 의해서 영상을 필름에 정착시키고 영사기를 통해서 스크린에 영사한 가장 완전한 형태의 영화의 발명이었다.

그러한 뜻에서 영화사에서는 "르미엘" 형제가 영화를 발명한 사람이라고 흔히 말한다.

그러나 이보다 앞서서 미국과 영국같은 나라사람들은 영화의 발명에 기여했다. 유명한 미국의 발명왕인 "토마스.에디슨"은 1889년 10월 6일에 "키네토스코프(Kinetoscope)"를 발명했다.

촬음기를 만든바 있는 "에디슨"은 마찬가지의 원리를 눈에 이용해서 "필름"에 사진을 찍어서 운동을 재현하는 것에 착안을 하고

성공했다. 여기에서 흥미있는 것은 축음기의 소리와 필름의 운동을 연결시켜 보려는 시도이다. 

"에디슨"은 "브랙.마리아"라고 하는 세계최초의 촬영소를 짓고 실험을 위해서 50Feet 짜리 필름을 찍었다. 

이 "에디슨"의 "키네토스코스"는 음상자속을 한 사람만이 들여다 보게된 상자속의 영상이였다. 1894년에 역시 미국의 "프란시스.

젠키스"가 [무희아나벨]를 자기집에서 "스크린"에 비추어지는 활동사진을 상영했다. 이것이 "바이다스코프"(Vitascope)이고, 이것을 개량해서 다음해(1895년)에 완성한 것이 "판타스코스"(Phantascope)이다. 이것이 미국영화사업에 크게 기여하게 된 것이다.

영국에서도 "로버트.W 폴"이란 사람이 1896년에 "디아트로그라프"(Theatrogiaphe)라 이름진 영화가 런던에서 공개되고, 독일

에서도 1895년에 "막스.스크라다노브스키"가 "베리린"에서 "바이오스코프"(Biosk-ope)를 발표했으며, 같은 독일의 르미엘이라고 일컬어지는 "오스카.메스커"가 1896년에 역시 "베리린"에서 "비오픈"(Biophon)을 공개했다.

이 "비오픈"은 완전하지는 않지만 발성영화였다.

이러한 것들이 19세기말, 10년 사이에 미,영 각국에서 거의 동시에 영화를 발명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생각해볼 것이 영화의 발명에 앞선 사진술에 대한 발달이다. 이 사진술과 "필름"의 발달이 없이는 영화의 발명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간단히 살펴본다면 사진술의 시작은 16세기 부터이다.

이태리의 조각가 "G.B.데라.폴터"가 음상자의 원리를 처음으로 밝힌이례. 음상자를 "환등"에 응용한 것은 1660년 덴마크의 수학자인 "반겐.슈타인"으로 알려져 있다.

1957년에 와서 "I.B.베커리"라는 사람이 "감광막"에 대한 광선의 사용을 발견하여 사진술에 결정적인 요소가 되었고, 사진술의

원 발명자는 "죠셉 니세폴의 니에프스"라고 하고, 그는 1822년에 감광층으로서 아스발트를 사용하여 영상을 영속시키는데 성공했다.

"니에프스"의 노출시간이 백주의 태양으로 6시간에서 8시간이 소요됐다고 한다.

1839년에 와서 "다겔"은 이 노출을 3분에서 4분으로 단축했고, 1841년에는 "렌스"가 나타나게 되어 기사체를 태양에 내놀 필요가 없어지고 노출시간은 약 5초로 단축했다.

1871년에는 "R.L 마독스"가 "제라친" 취화물을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1884년에 "죠지 이스트만"이 제라친의 필름을 발명하였고, 1887년에 "세로로이드"필름을 제조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코닥" 필름이나 "후지"필름이 발전되었고, 영화의 발명으로 이어진 "핵"이 되었다.  

 

◦영화의 전례

이와같이 미국을 비롯한 프랑스, 미국,독일 등의 나라는 영화에 대한 발명으로 개발한 나라이며, 그밖의 나라는 영화를 전수 받은 나라라고 말 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말할것도 없이 일본도 미국으로 부터 전수받은 영화의 도래국에 속한다.

영화가 일본에 최초로 건너간 것은 1896년 "르미엘"이 "시네마토그래프"를 발명한 다음해로 알려져 있다.

수입경로는 "고베"(신호)에 있는 "리넬"상회라는 무역상을 통해서 총구상을 하고있는 "고려신치"가 영사기와 필름을 수입한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영화의 도래시기가 언제인가? 대표적인 조사에 의하면 일반 대중에게 공개된 시초는 1903년 6월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영화 문화연구소(소장 이창용)의 조사 발표를 보면, 일본의 영화업자인 "길택상회"의 다중영화사반이 영미연초상사의 담배판매 선전을 위해서 이 다중영사반을 이용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를 뒷받침하는 것이 황성신문 1903년 6월 23일 자의 광고문이다.

활동사진 광고문

[동대문내 전기회사 기계수에서 시술하는 활동사진은 일요일 음우을 제하는 외에는 매일 하우 8시부터 10시까지 시행되는데 대한 급 가미각국의 생명도시 명동극장의 절승한 광경이 구비하외다. 허입요금 동화십전]

한편, [한국영화측면필사](서자 안종화)에는 동대문의 전차창고에서 공개되기 전에 서울 정동에 있는 독일 여자가 경영하는 "손탁 호텔"에서 상영한 적이 있다고 하거니와 이 호텔은 주로 외교관들의 사교장이였으므로, 일선에게 공개된 시초는 1903년 6월이 유력시 되고 있다.

이렇게 보면, 우리나라에 영화가 들어온 것이 일본에 비해 7년이 뒤졌고, 일본인에 의해 도입 되었다는데 주목해야 한다.

 

​한국영화의 기점

우리영화는 알려진대로 1919년 10월 27일 단성사의 경영주인 "박승필"이 출자하고 "김국산"이 각본을 써서 감독해 [의리적 구투]을 단성사에서 상영한 것을 기점으로 삼고 있다.

이 영화가 한국인의 손으로 만들어진 최초의 작품이라고는 하지만 "스탭" 가운데 촬영인은 일본인(궁천)이 각색과 편집을 겸하고 있었으므로 완전한 우리의 기술로 이룩된 작품은 아니다.

이 작품은 35m/m​ 1권으로 만들어져 연극중에 상영으로 비추어지는 연속활극물로서 극장안에서 기차, 한강다리 등을 볼 수 있는 시초의 활동사진이다.

이러한 연속극은 원래, "이정용봉" 일파가 일본에서 시작해서 1915년항까지 성행하여, 극단 "뢰호범해"가 1918년에 서울의 황금연여관(지금의 국도극장)에 내한공연한 것이 한국영화의 준 직접적인 영향의 하나이다.

[의리적 구투]가 일본인(궁천)에 대하여 촬영된 것에 비하여 [지기]는 최초로 한국인 (이필우)이 촬영을 한 첫 작품으로 명실상부

완전한 한국영화로 기록되어 있다.

[지기]이 작품은 35m/m 5권으로 문예단을 이끈 "이기세"가 제작, 각본, 감독하고 촬영에는 "이필우"가 현상편집을 했다.

 

◦최초의 촬영인 "이필우"

영화사에 있어서 최초로 "지기"란 작품에서 촬영을 담당한 이필우에 관해 살펴보기로 한다.

1897년 11월 27일, 서울에서 출생하고, 8살에 부친을 잃은 것으로 되어있다.

그 부친은 지금의 을지로 1가 네거리에 "이필우 시계포"를 차려주었는데, 여기에 사진부를 만들어 놓고 이명우(친동생)와 함께

"스라이드"와 영사기를 마련하여 필름을 얻어다 돌리곤 했다. 공성학교에 다니던 그는 참을 수 없는 호기심으로 우미관의 영사실 조수를 희망하고 있다가, 16살의 소년으로 영화기술을 배우기 위해 현해탄을 건너 일본으로 간다.

"오사까"(대판)에서 그는 제국 키네마계의 소판촬영소에서 촬영,현상,기술을 편집하고 19살에 귀국 했다.

이때의 일본영화계도 극영화는 영국인기사가 장기계약해서 일하고 있을 때이고, 일본 촬영계의 원로인 "소곡헨리"가 미국에 가서 공부 할 때였다. "소곡헨리"가 허리우드에서 돌아와 공정촬영소에 들어간 것이 1920년이다.

일본영화가 1920년 "소곡"가 공정에 들어가서 본격적인 촬영기술을 발효한 것으로 보면, 우리 영화의 촬영기술도 늦은 편은 아닌 것 같다.

이윽고 서울에 돌아온 이필우는 이기세가 연출한 "지기"의 촬영을 맡았고 그 후로 여러편의 연속극을 만들었으며, 조선총독부위생과에서 "호열자"를 계몽하기 위한 계몽영화의 촬영을 하기도 하고, 순종황제 인산때는 기록뉴스를 촬영한 최초의 카메라맨이기도 했다.

한국영화의 초기에 촬영기술을 발전시킨 그는 1920년 4월 29일 "장한몽"을 촬영 현상 편집하여 발표하고 기록물 "전선여자정구대회" "장화홍련전" "한강대홍수" "멍텅구리" 등의 작품을 만들면서 무성영화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이때의 생필름 가격이 (Feet당)네가필름이 1전2리, 포시필름이 1리 5모였고, 제품은 Agfa였다.) (당시의 쌀소두 한말 값이 80전내외)

일본의 지배하에 있던 시기의 이 나라에는 영화계도 일본인이 주도하게 마련이다. 1924년 6월, 총구화락상을 하는 "나데.오도이찌"가 조선 키네마 주식회사를 설립하고 기술집을 일본의 경도에서 "스또"(득등) 대판에서 "사이.또"(경등) "미야.시다"(궁하)등을 초청하여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간다.

제1회 작품이 "해의 비곡" 인데 각본, 감독,이 "왕필연"으로 되어있으나, 본명은 "다까시 간죠" (고제실장)이라는 일본인으로서, 문학도였고, 기술진에는 "사이.또"가 촬영 등을 맡아 처음으로 블란서제의 "파르보"카메라를 구입해 사용했다는 것은 기억할 만한 일이다.​

"조선키네마"의 제2회 작품은 [운영전]인데, 이 작품에는 김해에서 합성학교 교편을 맡고 있는 윤백남을 초청하여 이선필사에서 평안대군(세종대왕의 제4남)의 비화를 내용으로한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한국영화의 선구자로 말 할 수 있는 "나홍규"가 "운영"의 가마를 메고가는 교군이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그로부터 1926년까지 영화의 기술면에서는 "사이.또"를 비롯해서 "미야가와" "니시.가와"(서천수양) "가.또"등이 담당해왔다.

 

◦아리랑과 춘향전

[의리적 구투]가 발표된지 7년! 일제 식민지하에서 우리의 민족영화가 만들어진 것이다.

한 갓[운영전]의 교군이든 춘사 나홍규는 자신이 각본을 쓰고, 감독, 주연을 맡아 한국영화의 예술성을 높임은 물론, 민족의 한을 일깨워 준 작품이라는 점에서 지금도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아리랑"을 만든 것이다.

그런데, 이 작품들의 제작과정을 보면 아주 "아이러니"한데가 있다.

"아리랑"이 제작회사가 일본인이 설립한 조선키네마사 이고 제작자는 일본인, 기획도 일본인, 촬영, 현상, 편집 등이 적제, 일본인 모두가 일본인의 손에 의하여 만들어졌고, 이보다 앞선 1923년 12월에 한국에서 첫번째로 제작 된 "춘향전" 또한 일본인 "초전증태랑(고단)가 제작, 각본, 감독, 편집을 "궁천"가 촬영을 담당하였고, 배우만을 변사이던 "김필성"이 이도분에 기생인 "한설"이 춘향역을 맡아 35m/m 9권으로 완성하고 일본에까지 상영하여 대성황을 이루었고, "아리랑"또한 35m/m 9권으로 만들어져 1926년 10월 1일에 단성사에서 개봉되었는데 첫날부터 극장앞에는 군중이 운집해서 장사진을 이루고 문짝이 부서지는 대성황을 이루었고, 전국 방방곡곡에서 상영 되었다.

[활동사진 필름 검열규칙]이 조선총독부명제 제 59호가 그해 7월 5일 자로 공표 되었다. 

전문 13조 부칙으로된 이 [활동사진 필름 검열규칙] 의 내용은 규제를 가하고, 제한을 위반한 자에게는 징역 또는 벌금에 처하게 되어 있다.

이러한 법명이 공표된지 몇 개월도 되지 않은 때에 "아리랑"이 검열에 통과된데 관해 조선총독부는 큰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당시의 검열은 조선총독부 경무국 고등 경찰과에서 하고 있었는데 무난히 통과된 것은 일본인회사가 제작하고, 일본인 명의로 검열을 신청한데서 별로 신경을 쓰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규칙하에서도 한국 영화는 계속해서 소규모이긴 하지만 만들어지고 있었으며, 한국 영화인도 기술 습득과 더불어 맥을 이어갔다. 

한국영화 최초의 촬영인 이필우에 이어 1926년 "한창섭"이 [산래왕]이란 작품을 촬영, 현상하여 최초의 활극영화를 내놓았고, 같은해에 [풍운아]란 작품에서 촬영기사로 "이창용"이 배출되었다.

다음해(1927년)에 [낙화유수]란 작품에 "송수열"이 촬영을 담당하였는데 특이할 사항은 1920년 제품의 "윌리야드"란 카메라를 일금 1,100원에 사들여 촬영을 했다고 한다.

같은해에 [뿔빠진 황소]에서 촬영에 "민문양"이 배출되었으며, 또한 [운명]이란 작품에서 이필우의 실제인 "이명우"가 촬영기사로 데뷔했다. 여기에서 특이할 사항은 우리 영화최초로 이명우는 [수일과 순애]의 작품에서 이동촬영을 한 것이다.

1928년에 [순정은 신과 같다]에서 "이규상"이 [사나이]에서 "손용진"이 1929년에 [약혼]에서 "김요하"이 촬영,감독으로 1930년에 [노래하는 시절]에서 "태홍아"가 윤봉춘이 감독한 [도적놈]에서 "이진권"이 [매심곡]에서 "이신웅"이 촬영기사로 배출되었다.

1931년 "이창근"은 (현재, 본회, 명예회원) 평양에서 서양키네마사를 설립하고, [죄지은 여자]를 제작, 감독, 각본, 촬영, 현상, 편집까지 혼자의 힘으로 작품을 완성한 것이다. 

이런분들에 의하여 무성영화기는 영화의 기술은 촬영을 담당하면서 현상, 인화, 편집에 이르는 전 과정을 손수 정리 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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