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Society of Cinematographers
본 회원 외는 본 마크를 사용할 수 없음. -특허출원-

한국영화 촬영사

한국영화촬영사(2)

알렉사65 0 5,851

한국영화 촬영사(2) 

             촬영감독 이성춘


◦ 한국영화의 "풍운아"들 

우리영화가 탄생해서 얼마동안은 지금과 같은 형태의 분야로 구분되지 않은 채, 감독, 작가, 연기자, 기술자의 구별없이 남자가 여우로 변장해야하는 형국이었다. 초창기의 얼굴로는, 윤 혁, 이월화, 김조성, 안종화, 이채국, 나운규, 주인규, 문수일, 이병선, 김우연, 주삼손,김정숙, 남궁운, 이규호, 조천성, 이백수, 김소진, 김쾌윤, 이천규, (여우역), 고수철, 최여환, 이쾌윤 등이 전부였다.


동아문화협회(제작자, 조천증태랑(고주)가 감독, 각본, 편집한 "청춘전"(촬영은 일본인, 궁천)이 조선극장에서 개봉하여 대성황에 이르자 자극을 받아 단성사는 영화부를 설치 하고, 부산에는 키네마주식회사가 설립됐다.

여기에 관여한 안종화의 말에 의하면 부산에서 소아과병원을 하던 "가등"을 위시해서 "고좌", "도변"등의 일인실업가들이 자본금 20만엔을 적립하고 총구화약상을 하던 "아오이이지"(청일)가 사장으로 됐다.

제1회 작품이 "해의 비곡" 각본, 감독은 왕필열이 담당했다. (왕필열은 본명이 "다까사.간죠" (고좌관장)라는 일본인으로서 본시가중(승적)이 였고, 문학도였다한다)

연기진은 그 당시에 부산에 와서 연극"부활"을 공연하던 [무대예술연구회]의 동인들을 부산에 사는 "윤억"(연극동호인)이 교섭해서 이루어졌고, 그 "스탭, 카스트"는 각본, 감독에 왕필열, 감독보에 이경손, 촬영에 제등(후반은 항등) 배역에는 진문기, 안종화, 이주경, 이채국, 유수영, 박승호, 윤억, 주삼손, 이경손, 이월화였는데 그 가운데서 훗날 크게 활약한 이경손, 안종화, 여배우로 이채국,이월화 등이 있다.

조선키네마주식회사를 비롯해서 동아문화협회 단성사, 촬영부, 윤백남 프로덕션, 고려키네마, 고려영화제작소, 계림영화사, 반도키네마사, 조선키네마사 등이 생겨났다. 초기의 영화인들 중에서 지도적인 인물들은 그 무렵의 최고의 교육을 받은 지식인들이였다. 비록 일제에 억압당하여 겉으로 크게 표현하지는 못했지만 민족정신과 계몽적사명감을 가지고 활동했다. 

이 무렵, 현철, 이구영 등은 새로운 예술가를 양성하기 위해서 조선배우학교를 만들어 복혜숙, 이금룡, 서월영 같은 인재를 길러냈다. 

"심청전"을 감독한 이경손은 저항의식을 심어주기 위한 소박한 애국주의와 현상주의를 테마로한 "춘원" 이광수 원작 [개척자]를 사재를 털어 제작, 감독, 각색하여 만든 최초의 근대소설을 영화화한작품이다.

그후 이경손은 "장한몽"을 각색, 감독하였는데, 촬영도중에 이수일역을 맡은 "주삼손"의 실종사건으로 다른 대역을 써야하는 파란을 겪었는데 그때 대역을 맡아 데뷰한 신인이 바로 유명한 [상록수]의 작가 "심훈"이였다.초기의 활동영화[산한왕]에서도 촬영도중 "강홍식"이 일본으로 건너가 "임운학"으로 대역하는 이변을 겪었다.

1928년 이경손은 한국 최초의 영화잡지 [문예영화]를 출간하고, 영화계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 신인양성기관인 [영화학리연구부]를 창설하기도 하였으나, 그 해 9월 19일 총독부령 제65호로 [활동사진필름검열규칙]이 엄하게 개정공포되고, 흥행이 부진하자 유능한 영화인들중에는 전향과좌절을 가져왔다.

그 대표적인 예가 초창기부터 감독이요 작가였던 이경손에게서 볼 수 있다.

1928년에 [수경낭자전]을 마지막으로 제작, 감독한 이경손은 (촬영, 한창섭) 빼앗긴 조국에서 예술을 불태울 정열마저 막혔을 때 그가 남긴 글은 마지막 망명기와도 같다.


1928년 1월 10일 동아일보에 실린 글을 보면 (전략)

[선생.

이제는 저도 달라지겠지요. 문화를 무시고고답적으로 날뛰는 저도 이제는 지각이 납니다. 첫째 욕먹기 싫어서요(중략)

참 작년에는 촌에서 제작소가 많이 생겼습니다. 평양, 진주 등에 그것이 생겼습니다. 제작이 하고 싶었다는 욕심보다는 아마 경제상 어수룩하지 않아보려는 이유도 있었겠죠.

아시는 바와 같이 서울에서는 제작비를 투기꾼에게 취하고보면 사진이 빼앗기기쉽습니다. 하여간 의주 같은 적은 곳에서 독립하여 보겠다고 사람이 왔을 때는 이상히도 감격되었습니다.

항상하는 소리입니다만은 흰옷입은 무리들이 좁은 개울, 모진 봉우리를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사진을 만든다고 하니 생각만해도 가련한 신화가 아닙니까.(중략)

지금의 구경꾼들은 돈있는 집 자손이 아니면 기생입니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고, 때로는 못된 것까지 좋다할 그들입니다.

선생.

그러한 사람의 돈으로 살아가려면 어떠한 꼴이 되겠습니까? 그것을 소위 병정이니 조방꾼이니 합니다.

그들은 차츰 대신 도임역자의 짓을 합니다. 이러한 이치로 보아서 저도 조선사진안에서 보는 시답지 않은 어릿광대의 장면을 가장 싫어합니다. 죽으면 죽었지 그들앞에서 오히려 그들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래서 안되면 그만 두려합니다.]

결국 이경손은 모든 의미를 잃고 한국땅을 떠났다. 상해로 간 그는 그곳에서 전창근과 만나 [양자강]이라는 작품을 만들고나서 다시 발길을 태국으로 건너가 실업자가 되는 풍운아였다.


◦ 나운규와 윤봉춘

나운규와 윤봉춘은 1920년, 함흥 회령에서 같은 해에 태어났다.

보통학교를 회령에서 마친 그들은 고향을 떠나 간도로 가서 명동중학에 들어갔다.

조선독립군의 활동에 가담한 그들은 간도도판부 사건에 주도적으로 활약해서 일경으로 부터 지명수배를 받아 만주땅으로 뛰어 김용국과 함께 방랑의 길을 걷는다. 이미 그들은 회령에서 만재사건에도 맹활약해서 요시찰인들이였다.

고향을 등진 그들은 배가본드의 생활을 거치면서 뒷날, 그들의 작품속에 그 영향이 나타난다.

뿔뿌리 헤어져 방랑의 길을 걷는 그들은 얼마후에(1920년) 서울에서 만나 연희전문학교(연세대전신). 문과에 다니게 되는데, 이때 회령에서 파견된 형사에게 체포되어 함흥으로 끌려가서 청주형무소에서 2년 동안 옥고를 치른다.

1923년에 출감한 운규는 부친과 형은 사망하고 참담한 생활에 처한 그 무렵, 함흥지방을 순회 중이였던 신극단체[계림회]를 따라 서울에 와서 안종화, 김태진, 김운선, 허소매 등이 주동하는 [계림회]에 입단하고, 윤봉춘은 회령에서 교회의 교인이 된다.

얼마못가 [계림회]가 해산되자 나운규는 안종화의 소개로 부산에 있던 조선키네마주식회사에 가서 배우시험을 치른뒤 연구생으로 들어간 것이 1925년이였다. 거기서 윤백남이 감독한 [운영전]에 단역으로 교군으로 출연할 기회를 얻은 것이다.

이 기쁨을 표현하기 위해서 그는 교군으로 나온 스틸사진 한장과 벚꽃 꽃잎을 하얀 봉투에 넣어 고향에 있는 윤봉춘에게 보낸다.

회령에는 옥고를 치르고 나와 교회에서 일을 보고 있던 윤봉춘이 그 봉투를 뜯고 그리웠던 우정의 향기를 맡는다. "아리랑"을 발표한 나운규는 그해 [풍운아]를 조선키네마사의 3회 작품으로 감독을 하고 여기에 이창용이 촬영을 맡고, 이명우가 참여했다.

1926년 11월 14일 [풍운아]를 조선극장에서 개봉한 나운규는 곧 [아리랑]과 [풍운아]의 프린트를 들고 고향 회령으로 돌아간다.

춘사를 맞이한 회령에서는 유일한 극장인 [만영좌]에서 환영식이 베풀어지고, 윤봉춘이 환영사를 한다.

이때 [아리랑]을 보고난 윤봉춘을 크게 마음이 움직인다.

영화가 민중의 마음을 움직이는 큰 힘을 가진것에 이 독실한 기독교인은 감탄했다. 영화는 한번 만들어 놓으면 설교처럼 그때마다 해야하는 노력이 생략될 수 있는 것에 마음에 든 것이다. 윤봉춘은 춘사에게 영화인이 될 것을 결심하고 제의한다.

다음해 3월에 나운규로부터 [곧 상경하라]는 전보를 윤봉춘은 받았다. [개벽] 잡지 한권을 든 윤봉춘은 고향을 떠나 영화인이 되는 첫발을 걷는다.

서울에 도착한 윤봉춘은 처음으로 "시나리오"라는 것을 받아 가지고 여인숙에서 밤새 읽고 얼굴표정 몸동작을 연구하던 그 다음날 윤봉춘은 배우가 된다. 이 작품이 조선키네마사 4회작으로 내놓은 [들쥐]다.

이 작품에 나운규가 감독출연을 하고, 상대역으로 윤봉춘이 데뷰하게 되고, 촬영을 이창용이 담당했다.

그들은 조선키네마사의 5회작품 [금붕어]를 마지막으로 헤어진다. 그 발단은 윤봉춘과 일본인 사이에 일어난 충돌 때문이였다.

1927년 7월에 [금붕어]를 단성사에서 개봉한뒤 조선키네마사를 그만둔 그들은 나운규를 비롯하여 이금룡, 박정섭, 신일선, 김보신, 김정숙, 선화정, 윤봉춘 그리고 이창용 등이 창신동에 [나윤규프로덕션]을 차렸다.


◦ 지방영화사(촬영소)와 촬영인 

우리 영화가 태어나서 무성영화기에 활동한 촬영인을 살펴보면, 1924년 [장화홍련전]을 촬영한 [이필우]가 시조인 것이다.

그 다음으로 (한국영화총서에서 발취)

한창섭(1926년, "산한왕", 감독.이경손)

이창용(1926년, "풍운아", 감독.나운규)

주수열(1927년, "낙화유수", 감독.이구영)

민우양(1927년, "뿔빠진 황소", 감독.김태진)

이명우(1927년, "운명", 감독.김해봉)

이규호(1928년, "정신은 신과 같다", 감독. 이규호)

손용진(1928년, "사나이", 감독. 홍개명)

김서정(1928년, "혼가", 감독.김서정)

태홍아(1930년, "노래하는 시절", 감독.안종화)

이진권(1930년, "도적놈", 감독.윤봉춘)

이신웅(1930년, "회심곡", 감독.미상)

이창근(1931년, "산괘령", 감독.이창근)

황 운(1932년, "딱한사람들", 감독. 황 운)이고, 작품 편수로는(1934년까지) 이필우(13편), 이창용(6편), 민우양(6편), 이명우(8편), 이신웅(10편)으로 기록되었고, 그밖에는 한 두편에 그쳤다.


조선키네마사(1924년 6월 창설)를 비롯해서 무성기에 10여년 동안 유명무명의 영화사는 무려 42개사가 있었으나, 제작해낸 총 편수는 158편으로 기록되었다. 그러니까 한 영화사가 4편의 영화를 만든 셈이지만 1사 1편으로 문을 닫은 영화사가 태반이였다.

지방의 영화사로는,진주에 "남향.키노"(강호) 나운규가 관계한 대구의 "대구촬영소", 또한 대구출신 이규한이 "영남영화사", "청구영화사", "성봉영화사" 평양의 "평양키네마" 그리고 "평양서선키네마"가 있었다.

이 지방의 영화사는 대개가 그 지방의 출자자가 나타나면, 스탭, 캐스타가 그 지방에 불려가서 한편의 영화를 만들고는 곧 해산되고, 하였으나 부산의 "조선키네마주식회사"는 제법 큰 규모로 4편의 작품을 만들어 단성사와 상영계약을 하기까지 하였다.

이창근(본회명예회원)이 1927년 3월에 세운 "평양서선키네마"는 자신이 제작, 감독, 촬영, 현상, 편집까지 하면서 "산괘령" , "죄지은 여자", "도회의 비극", "돌아온 괘령" 등을 만들고 여기에 특기할 것은, 1937년에 "동양토오키제작소"로 이름을 바꾸고 일찍이 이필우가 카메라를 다루고 스스로 녹음기를 조립한 것처럼 이창근 자신이 "카메라"를 만들고 (이후, 미첼과 같은 "코첼"을 만들어냄) "토오기" 시대를 맞이하면서 녹음기도 직접 만들어 제작한 것이다. 그래서 이필우는 P.K.R. 발성장치를 이룩했고, 이창근은 L.C.K. 발성시스템을 이룩했다.

그밖에 대구에서 활동한 이규한은 "임자없는 나룻배" (유신키네마)를 감독, 발표하고(촬영, 이명우) "밝아가는 인생" 촬영은(일본인.등중) "바다여 말하라"(청구키네마) 등을 대구에서 만들었다.

진주의 "남향키노사"는 강호가 제작, 주연 하여 "암로", "지하촌"를 만들었으나 경향파, 영화인들의 작품으로 "암로"는 금영의 규제와 사회적 불안으로 실패하고 "지하촌"은 당국의 심한 감시로 촬영을 중도에 미완성으로 끝나고 말았다.

또한 지방으로는 "통영"(지금은 충무) 을지영화사가 "갈대꽃"(촬영, 손용진, 안상홍, 감독.이구영)을 만든 것으로 되어 있다.

이와같이 지방의 제작자본에 따라서 그때 그때 영화인들이 이동하면서 영화를 만들어 왔다.


◦ 현상 

그 당시의 현상방식은 "밧트" 또는 "핀현상이라고하는 방식"이였다.(그림) 이 방법은 십자로 된(그림1) 나무에다 적당한 간격으로 머리를 잘라낸 "못"을 박은 사이에 "필름"을 감아서 큰다라에 "이스트만" 처방의 현상약을 물에다 탄 다음(그림2) 그 액속에 "핀"을 담그고, 노출된 필름의 화상을 눈으로 봐가면서 적당하다 싶으면, "핀"을 드러내어 정착파(하이포)에 옮겨담아 화상을 정착시키는 방법이였다.

따로 현상소가 있는 것이 아니라 가정집 한 방을 암실로 만들고, "네가" 현상인 경우에는 "청색 등광"으로 필름의 농도를 비추어 가며 확인하고, "포시" 현상의 경우에는 "적색 등광"을 사용한다. 16m/m의 현상은 한번에 200척 정도가 "핀"에 감긴다.

그 당시의 사용된 필름은 "이스트만 코닥'사의 제품이였는데, 35m/m 네가필름 한곳에 발오리. 포시필름 1척은 오리였으므로 자본이 약한 경우는 "네가" 필름으로 촬영하지 못하고, "포시" 필름으로 직접 촬영해서 만든 작품도 많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화질의 좋고 나쁜것을 평가하기보다는 어떻게하면 그림을 나타내는가에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카메라"의 회전속도도 일정한 것이 아니고 "크랭크"(카메라를 돌리는 장치)로 수동회전하니 속도가 같을리가 없다.이렇게 만들어진 영화가 극장에 상영되면 영사반은 그것에 맞추어 손으로, 돌리고 변사는 그 동작에 따라서 빨리 움직일 때는빠르게 느린 동작일 때는 느리게 감정을 표현한 것이다. 이런 그림을 보고, 따라서 잘 구사할  줄 아는 변사라야, 명변사이고, 이에 따라서 관객을 모는 수단이기도 했다. (임병호 선배의 증언)


◦ 무성기의 명국은 

영화를 발명한 나라들은 그동안 어떻게 발전하였는가를 참고로 살펴보면,


<미국>

초창기에는 1,2권 정도의 단순한 활극이 "시카고"를 중심으로한 "니크로디온"에서 널리 흥행되었다가 1919년에 와서 "에디슨"의 "키네토.스코프'를 시작으로 주요한 영화사를 묶어, 시장 독점을 목적으로 "활동사진특허회사"를 만들고 다음해 "제네랄영화회사"를 창립시킨다. 여기에 대립해서 "뉴욕에 거점을 둔" 윌리암.폭스"를 위시한 독립제작자들이 규합해서 "제네랄"의 횡포와 싸워 "샤만반트라스트법"으로 정부에 대해 고소를 제기하여 "제네랄"사는 결국 1913년에 해산이 되고, 전 미국의 영화사는 "시카고"에서 "켈리포니아"로 이동하여 지금의 "허리우드"의 초기를 만들었다. 이 무렵 미국영화계는 "이태리"영화인 "쿼바디스", "에리자베스여왕" 등의 영향을 받아 장편영화를 만들게 된다. 이때까지만 해도 미국영화계는 [장편영화는 관객이 안온다]는 것이 정평이였으나 "D.W. 그리피스"가 [인토레린스], [국민의창생]을 만들어 일대혁신을 일으켰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미국영화는 "프랑스"나 "이태리" 영화를 누르고 전세계를 제패한다.

이무렵 "아돌프.즈카"는 "파라마운트"배급회사를 세우고 1년에 104편이나 되는 실적을 올리고 한편, 극장체인을 가장 많이 쥐고 있는 "윌리암.폭스"와 "마커스.로우드"도 자신의 극장, 상영프로를 위해 제작을 시작한다.

이 무렵에 미국에는 "스타.시스템"이 확립되었는데 "메리.빅포드", "챠리.챠프린", "세실.B데밀" 등은 그들의 작품을 배급하기 위해서 협력하여 "유나이티드.아티스트"사를 만들었다.

이렇게 해서 미국영화는 대작주의와 스타시스템에 의하여 번영의 절정을 이루고 "세실.B.데밀"의 [십계], "메트로"의 [벤허]등이 그 대표적인 예다.


<프랑스>

"르미엘" 형제가 "시네마토그라프"를 발명한 프랑스 영화계는 화려한 출발과 함께 영화를 기업으로 인정하고, 그 활발한 장래를 미리 예측하고 1895년 "샤르트.빠데"는 "빠데" 회사를 설립하고 파리교외에 있는 "방상느"에다 세계 최대의 "그리스.스테이지"를 건설하는 한편 "몽뤼"와 "니스"에도 촬영소를 세우고 영화제작에 나선다.

"레옹.고몽"도 1986년에 "고몽"회사를 설립하고 영사기[고몽.크로노]를 제작 판매하면서 "디스" 촬영소에서 영화를 제작 했다. "에그레르", "오벨" 회사등이 뒤따랐다.

1920년에서 1929년에 걸친 무성기의 "프랑스"는 영화를 제작한 나라로 더 알려졌다.

"루이.메릭"이나 "레옹.무시낙"을 비롯한 아방가르트 영화의 선구적 미학자 "말셀.레르뷰" 같은 제작자들이 수없는 명작을 만들었다. [전쟁과 평화], [철로의 백장미], [슬픔의 피에로] 등은 우리에게도 큰 감명을 준 작품들이다.


<영국>

"프란시스.젠킨스"가 처음으로 영화를 발명한 영국은 "로버드.폴"이 "애니마토.그라프"를 사용해서 활동사진을 만들어 공개하고 "포리즈.그린"은 천연색영화를 연구한 사람이다. "세실.헵워즈"는 1989년에 파카회사를 일으켜 영국에 있어서의 영화기업을 뿌리박았고, 천연색영화인 [키네마 칼라]를 발명한 "챨스.아방"과 함께 선각자가 되었다.

1925년 영국상원에서는 "뉴톤"경이 영화의 문화적 가치와 사회적 영향을 크게 역설한 결과 영국에 있어서의 영화각성 운동이시작되었다. 영화법이 공포되고, 그 속에서 "쿼타"법할당법이 시행되게 된 것이 1928년 이며 이때부터 영국의 영화계는 활발해졌다.


<이태리>

이태리영화는 1906년 부터 시작하여 [트로이의 멸망], [삼총사], [맥베스] 등이 만들어졌으나 본격적인 것은 1908년 부터이다.

[쿼바디스], [안토니오와 크레오파트라], [카비리아] 등은 초기의 이태리영화로서 세계시장에서 크게 성공한 작품이며, 대담한오락성과 대규모의 세트를 사용하여 전세계를 놀라게 했던 것이다.

1914년에서 1919년 사이는 이태리영화는 황금기였으나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독일군이 이태리로 쳐들어오면서 영화계는 물론 침체상태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일본>

1896년에 영화가 건너간 일본은 "시네마토.그라프" 2대와 "바이다스코프" 2대가 거의 동시에 거너갔다. 초기의 영화, 제작은소서상점이 수입한 고몽식 촬영기로 촬영한 몇편의 단편영화가 1899년, 동경, 가무기좌에서 일본학생 활동사진학회가 주최로해서 그 효시가 되었다. 일본은 일지사변과 일로전쟁을 치르면서 뉴스 영화의 장르를 개척했다.

1912년 9월에 일활, 즉 일본활동사진주식회사가 설립되면서 영화사업을 독점하고, 상설관을 지배하면서 경도 촬영소에서는구파사극을 만들고 향도 촬영소에서 신파극을 만들어 배급했다. 이런 독점에 대해서 일활에서 나온 사람들이 동양상회를 세우고 영국과 [키네마 칼라]를 계약하고 다시 1914년에 일활에서 나온 중역들은 천활, 즉 천연색활동사진주식회를 만들었다.

1921년 4월에 창립한 송죽키네마주식회사는 [로상의 영혼], [노미인초] 등을 만들었다. 이 무렵은 일활과 송죽의 경쟁시대였다. 일본회사를 크게 진동시킨 것은 소위 관동대지진이었다. 

크게 타격을 받은 업계는 관서지방으로 이동하게 되었고, 반사적으로 개서지방의 영화업계는 뜻밖의 활기를 띠게된것이다.

이러한 무성영화기를 거친 세계영화는 발성영화(토이키 시대)로 발전한다.

Comments


Facebook Twitter GooglePlus KakaoStory NaverB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