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Society of Cinematograp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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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 촬영사

한국영화촬영사(3)

알렉사65 0 5,692

한국영화촬영사(3) 

촬영감독 이성춘


<발성영화>

-토오키 시대의 진입-

한국영화는 1935년에 최초의 "발성영화"가 등장했다.

일본인 "와께지마쥬지로"(분도주차랑)가 세운 경성촬영소에서 토오키 영화로는 처음으로 "춘향전"을 만들어 이해 10월 4일

단성사에서 개봉한 것이다.

이 영화는 "제작기획"에 분도주차랑, "원작, 이기세", "각색, 이구영", "감독.촬영"에 이명우, "음악, 홍난파", "조명, 현상, 녹음에

이명우"가 담당하고, 출연에는 문운봉, 한일송, 김연실, 노재신등이다.
이때 촬영, 녹음조수로 류장산(형님이 류장안 감독이고, K.S.C 회원이다가 작고)이 활동 했다.

한편 경성촬영소는 [춘향전]의 제작을 위해서 스튜디오를 개수하고 지금까지 사용해 오던 "카봉"을 새로히 100kw의 라이트시스템(전기)으로 바꾸었고, "벨르 앤드 호월(Bell & Howell)"프린타 1기를 설비했으며, 현상방식에 있어서도 종래의 "받드"현상에서

"탱크'현상방식으로 전환했다. 주 "받드"현상방식을 전호에 기술한바 있고, "탱크"현상방식은 나무로 짠 장사방형 통에 현상액을

넣고, 사각형으로 된 나무를(와구)에다 필름을 감은 다음 "현상 탱크"에 넣어, 현상액이 고루 파액되도록 자주 상, 하로 흔들어서

전등으로 로막을 확정한 다음에 꺼내어 같은 구조로 된 정착액 탱크에 옮겨 표착시키는 방식이다. ("탱크현상" 또는 "와구현상"

이라고도 함.)

이러한 기술 개혁은 일본에가서 촬영현상 공부하고온 이필우의 역량이 밑받침이 되었고, 녹음기술을 연구해서 경성촬영소 이전에

이필우와 나운규가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발성영화를 시도하려고 했던 것이다.(춘향전은 1923년 일본인들에 의해서 무성영화)로 제작된 바 있음.

이때, 마침 서울에는 워너사가 만든 디스크식 토오키 [러브, 퍼레이드]가 들어와 개봉했고, 뒤이어 필름식의 토오키도 들어왔다.

나운규 의 [아리랑 후편]을 완성하고난 이필우는 1931년 여름. 나운규와 함께 황해도 진남포에 요양하러 간 일이 있었다.

이때, 나운규는 이필우에게 디스크식 발성영화라면 우리도 만들어 보자고 제의 했던 것이다.

이에 동의한 이필우는 곧 일본으로가서 미나가와 (개천방조)를 만나 디스크, 녹음의 계약을 하고 돌아왔다. 이때는 일본에서도

디스크식 녹음이 시험단계에 있었다.

한편, 나운규는 발성영화의 자본을 만들기 위해 평양으로 로케이션을 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기획은 자본사정으로 뒤로

밀리고 이필우는 다시 홍순응, 배구자 일행과 함께 일본공연에 동행했다.

그 수입으로 "바르보" 카메라 한대를 구입한 이필우는 TV와 색채영화 녹음을 연구하기 위해서 일행과 헤어져 후일의 일본전신

전화주식회사의 "우의"박사를 만나 TV송신의 원리를 터득하고 다시 그의 소개로 대판송죽좌의 락사인 "쓰지바시"(토교)를 만나게

된다. 이 "쓰지바시"야 말로 후일 토교식녹음으로 일본 발성영화가 된 [마담과 아내]를 성공적으로 해낸 사람이다. 

그러니까, 한국과 일본의 초기 녹음연구가가 만난 것이다. 이때, 토교의 친구인 "나가가와"(중천)도 함께 연구하게 되었다.


(이필우는 이무렵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의 집에 가서 연구중에 있는 기계를 봤더니 미흡했다. 미흡한 점을 지적했더니 "쓰시바시"는 내것보다 더 잘만든것이 "나가가와"(중천)다. 해서 중천을 찾아가 봤다.

학자인 그는 사람됨이 좋았다. 기계를 전부 노출해 놨는데 광선이 필름으로 나오는 스립드 때문에 고심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내가 [좋은 수가 있다. 지금 상해에 폭스 17호 뉴스반이 와있는데 내가 가서 그를 보고 오마, 세 사람이 머리를 짜내면 될거 아니냐, 그러니 너희들은 "앰프"를 맡아라. "레코다"부분은 내가 맡으마. 내가 상해에 가 있는 동안에는 "레코다"를 못 만드니 그것을 동경에 있는 정기제작소에 맡겨라.] 

그리고 나서 나는 여권 사정으로 중천의 가게 지배인으로 상해로 갔다.

가서 "토오키"의 장치를 보여 달라고 했더니 서양 사람은 특허품이라서 안된다고 보여주질 않았다. 생각하다가 그 밑에 있는 중국

사람을 구워 삶아서 십원을 주고 그 기계를 봤는데 아무것도 아니였다. 원리는 넓은 것을 좁힌 것이였다.

"시린드 르 가리"라는 렌즈가 있는데 끝은 뽀죽하고 납작하게 되어 있었다. R.C.A에서 먼저 쓴 것이었다."

일본으로 돌아와 대판에서 중천과 토교를 만난 자리에서 나중에 보수를 위해서 서로 계약서를 썼다. [일본내의 권리는 너희들이 

가지고 한국에서 내가 필요로 할때는 언제든지 도와줘야한다.]라고 말한뒤 나는 상해에서 보고 온 것을 설명해 줬다.

렌즈와 "시린드 르 가리"를 서명하고 시험했더니 성공했다.

이것으로 일본에서 처음으로 만든 발성영화가 [마담과 아내]였다. 그뒤에 돌아와 단성사에 가서 이렇게 됐으니 나한테 만들게

해 달라 했더니 "되느냐","된다" 해서 우선 앰프만 만들어 시험했다. [앰프에 깜밖 깜밖하는 것을 필름에 반사시키면 되는 것이다.]

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돈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면 돈을 벌어서 하면 되느냐고 했더니 "좋다"고 해서 일본에 편지를 보내 가져온 것이 "M"이라는 사진(영화)인데 흥행이 엉망이였다. 울화통이 터져서 보통 영사기를 하나 뜯어서 만들었다. 그것을 독일의 스키사진을 비쳐봤다.(몽부랑의 폭풍).


(중략)

다시 동경에 돌아가서 3년만에 중천과 토교를 만났다. 그리하여 "족립"에 있는 일본녹음기술연구회에서 함께 "라이트, 봐르보" 

녹음기를 만들었다. 2선식을 개량해서 1선식으로 만들어 "웨스턴식" 특허와 달리했다. (이하생략)

영화사를 위한 증언 / 이필우 편 


위의 증언에서 보는 바와 같이 경성촬영소에서 네번째 만들어진 발성영화 [춘향전]은 우리 기술부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뿐만아니라 이필우가 일본에서 토교, 중천과 함께 앰프와 레코다를 개발한 사실은 일본의 발성영화가 등장한데에도 결정적으로

영향을 준것이 아닐 수 없다.

이필우는 이렇게하여 이 나라의 초기의 촬영기사이자 동시에 녹음기사이며 녹음기를 개발한 선구자였다. 더군다나 디스크식 발성

이 아니고 필름식 발성으로 만들었다는데 한층 더 벅찬 것이다.


명국의 발성영화 발전


<미국>

미국영화의 불황을 구출한것이 토오키의 등장이다.

당시 파산에 이른 "워너 브러더스"는 "바이타폰"이란 디스크식 장치를 사용하여 [돈.판]을 개봉해서 처음으로 토오키에 의한 영화

의 운명을 이르켰다. 다음에 만든것이 [재즈, 싱거]이며 엄청난 흥행실적을 올렸다.

그래서 [재즈, 싱거]가 토오키 영화의 시조처럼 알려져왔다.

여기에 따라 폭스사에서도 무비.톤에의한 토오키제작에 나섰고, 파라마운트, 메트로(M.G.M), 유니버셜등이 전 미국에 토오키

시스템을 완성했다.

토오키의 출현을 미국 영화사의 전기회사들과의 합작이 불가피하게 되어, "워너"는 "웨스턴 이렉트릭"과 합작했고, R.C.A는 F.B.O(프리, 복킹, 오피스)등과 합작해서 R.K.O를 탄생시켰다.

1929년 10월에 월가에서 일어난 공황의 바람으로 미국영화계는 다시 한차례 폭풍에 휩쓸려 윌리암, 폭스가 물러나고 R.K.O

와 파라마운트가 잇달아 파산하기도 했다. 그러나 1937년에 와서 제작계는 다시 정비되어 미국영화계를 대표하는 8대영화사가

형성되었다. 파라마운트, 메트로, 워너, 20세기 폭스, U.A 유니버셜, 콜럼비아, R.K.O의 8개사가 그것이다.


<프랑스>

프랑스에서 토오키가 등장한 것은 1930년 후반으로 미국보다 4년이나 뒤떨어졌다. 그 무렵에 세계적인 공항에 휩싸여 "빠데"

와 "고몽" 같은 명문들이 문을 닫는 비극을 맞이 했다. 1939년 이후에 어느 정도 경기를 회복한 프랑스 영화계는 [파리의 지붕밑]

, [상선테나시티], [파리를 우리에게], [파리계]에 이어서 [금남의 집], [여자만의 도시], [희망] 등의 명작을 만들어 냈다.

한편 이무렵 프랑스에는 영국자본이 들어와서 "빠데"나 "고몽"이 몰락한 이후에 프랑스 영화계와 제휴했다. 영국에서도 "파라마운트" U.A, 20세기 폭스, 워너, R.K.O 등이 지사를 두고 제작에 투자했다.

이와 관련하여 프랑스 정부는 1932년에 신영화법령을 제정하여 프랑스 영화를 보호하고 외국영화(주로 미국영화)를 억제하게 

된다.


그 주요한 골자는

(1) 외국영화는 6개월에 95편의 더빙판만 개봉을 허가 한다.

(2) 더빙을 프랑스 국내의 스튜디오에서 제작한다.

(3) 단, 예외로서는 "파리"에서 5관, 지방에서는 10관에 한하여 외국영화판의 상영을 허가 한다.

고 되어 있다.

30년대의 프랑스는 국내작품이 줄어드는 반면 미국영화의 수입이 비대해지는 것에 대응해서 이러한 비상책을 세워둔 것이다.


<독일>

독일에서 토오키가 처음으로 나온 것은 1929년이다.

"시멘스"전기회사와 "아.에.게" 전기회사가 합동해서 "토오미스"(토온빌트, 진디가드)를 세우고 이어서 각 발성회사가 각자의

특허권을 합쳐서 "크랑크 필름"을 세웠다. 이 두회사가 다시 합쳐서 "오트비오, 크랑크"필름이라는 토오키 제작회사를 조직하기에

이른다. 이 회사는 뒤에 프랑스, 이태리, 영국에도 진출하여 오늘까지 "웨스턴, 이렉트릭" R.C.A와 함께 세계 3대 토오키 시스템을 이룩했다.

[3대 오페라], [회의는 춤춘다], [미완성교향악], [쟌.다크]등이 유명하다.

1933년 "부류딩" 내각이 쓰러지고, 나치스 정권이 들어서면서 독일 영화계는 전면 통제에 들어 갔다.

이들 역시 미국영화를 비롯해서 외국영화를 제한하고 국내에서 제작하는 영화의 통제규정을 영화법으로 제정하여 강압정책을

썼다. 그 결과 1934년후로 나온 독일영화로는 "구스타브 우쯔키"의 [여명] 35년에 "레니 리펜슈타르"의 [음지의 승리] 1937년에는 [올림픽대회] 같은 나치스식 영화가 나와 독일영화의 정신적 원칙을 고갈시키고, 강압에 통제정책은 자유를 신봉하는 예술가들

을 실망케 했다.

이때, 독일을 떠난 유태계의 예술가나 감독, 배우들은 미국, 영국, 프랑스에 망명을 해버리고 만다.

이런 독일은 일본과 손을 잡고 제2차세계대전을 일으켰다.


<영국>

제1차세계대전까지의 영국은 세계영화 시장의 중심지나 다름없었으나 전쟁중, 전쟁후를 거치면서 미국영화가 크게 진출하여

국내 영화산업은 일시 위축되었다.

1925년 영국상원의 "뉴톤" 영화정책(전호에 기술한바있음.)에 힘입어 영국의 내국영화는 활발해졌다. 특히 "런던필름"을 이끌고

있는 "알렉산더 콜터"의 활동이 컸다.

명작 [헨리8세의 사생활]을 1933년에 발표한 뒤 [캐슬리여왕], [돈.판] 등의 걸작을 만들었고, "고몽 부리티쉬"도 [39제], [킹.솔로몬], [싸우는 민족]등을 만들었으며, 1936년에는 색채영화[사막의 화원]을 내놓았다.

영국은 가장 세계적으로 발달한 것이 기록영화(Documentury Film)부분이다. 1928년에 정부직할의 제국통상국이 생기면서

국내부의 선전을 위해 수많은 기록영화를 만들었다. 

1933년에 와서 제국통상부가 없어지자 이번에는 체신청이 이 사업을 계승해서 중앙우사국영화부를 신설하고 그 뒤부터 토오키에

의한 수많은 명작을 남겼다. [아랑], [류망선]등이 그 대표적인 작품이다.

"뉴톤"의 영화법에서 쿼타법을 간단히 설명하면 영국내의 영화상설극장에서 배급을 하려는 자와 흥행을 하려는 자에게 외국영화

와 영국영화의 상영비율을 법률로 정하여 영국영화의 보호육성을 꾀한 것이다.


<이태리>

제1차세계대전때, 독일군이 이태리를 침공하자 22개나 되는 이태리 영화계는 침체에 빠지고, 간신이 연명한 것이"스테파노 빠타르"였는데 그는 미국의 영화자본과 제휴를 해서 근근히 제작활동을 해왔다. 이 회사만이 1928년 부터 1930년 까지 토오키시대에 들어와서도 제작을 해왔다.

"믓소리니"의 독재정권이 들어서자, 영화를 정치적 선전에 이용할 목적으로 오랫동안 제작을 해온 "무찌에"게 경제적 원조를 주어

이를 정부 관리로 바꾸었다. 1926년 유럽에서 가장먼저 영화법을 만들어 "무찌에"로 하여금 이태리 영화계의 통제를 강행하여 

제작, 배급, 흥행을 한손에 쥐게 하였다.

이들도 미국여화를 제한하기 위해서 쿼타법을 제정하는 한편, 일련의 영화정책을 실현하기위해 1936년에 "치네치타"영화도시가

생겨났다. "치네치타"는 로마교외의 "싼.드.라뜨랑"에다 총면적 60평방메타, 스튜디오 건평은 10만 평방미터에 완전한 방음시설을 갖춘 철근콘크리트 건물 9개에 최신 "라보라토리"로 된 영화도시였다.

이 촬영소는 1936년에 250편의 영화를 만들어 미국영화에 대항하는 이태리영화의 르네상스를 기하기도 했다.


<소련>

제정러시아 시대는 프랑스의 "빠데"나 "고몽"의 영화를 수입했다.

1971년의 2월운명으로 좌절된 소련영화는 1919년 8월에 영화의 국유화가 결의 되면서 모든 민간의 영화사업은 인민문화부위원회가 관장하게 되었다. 

토오키의 등장은 1932년 이였으나 민간의 영화산업은 진작부터 볼수없는 형편이였다.


<일본>

일본영화계에 크게 변혁을 가지고 온것이 토오키(발성)의 등장이다.

일본영화기술사를 보면 1912년 9월, [야마도] 음영주식회사가 창립되면서이고, 사용된 기계는 영국제 [아니마도,휜]으로 되어

있다. 같은해, 12월에 "일본키네토 휜 주식회사"가 생기고 "에디슨손"이 발명한 "키네토, 휜"을 수입했다.

1927년 개천방조가 [호노필름]의 동양판권을 얻어 [소화키네마](주)을 설립하고 일본최초의 광학녹음방식에 의해서 [여명]을

만들었고, 1928년 9월에는 "동조정생"이 [일본토오키](주)를 설립하고 "디스크식" 토오키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일본영화의 본격적인 토오키의 성공은 1931년 8월에 송죽에서 만든 [마담과 아내]로 토교(쓰지바시)식 녹음법으로 만든 것이다.

이에 뒤따른 "일활"도 1932년에 P.C.L에 의한 토오키의 영화로 바뀌어지자 동경 일활의 "변사", "락사"들이 토오키 반대를 위해서 "스트라이크"가 일어나 전국으로 파급되었다.

(주, 일본영화 촬영자단이 경부를 중심으로 한 47명의 기사들이 1932년 5월에 결성)

위에서와 같이 영화선진국들은 우리보다 5년에서 10년의 격차로 발전해 왔다.


토오키 시대를 연 경성촬영소

경성촬영소는 일본인 "와게지마 쥬지로"(분도주차랑)가 세운 회사이다. 

"와게지마"는 예의 "원산만 프로덕션"에 자본을 대온 사람이었다. 70노인이 된 그는 원산만 프로덕션이 해체되자, 그자리에서

땐스 홀을 만들려고 하는 중에 이필우를 만나게 되어 [놀고 있는 시설을 맡아달라]고 했다. 이필우는 동생인 이명우에게 일임하도록하고 일본에서 돌아온 이명우, 이필우 형제가 경성촬영소를 실현시키는데 밑받침이 되었다.

경성촬영소는 1934년에 [홍길동전](감독 김소봉, 촬영 이필우, 조명 최진) "전과자".

1935년에 [대도전(감독 김소봉, 촬영 이필우, 조명 최진)의 무성영화에 이어 4개작품으로 발성영화 [춘향전]을 [의리적구토]이래

16년만에 토오키가 등장한 것이다. 그 다음으로 [아리랑 고개] (감독 홍개명, 촬영 이명우, 녹음 이필우) 1936년 무성으로 [장화

홍련전](감독 홍개명, 촬영 이명우, 조명 최진) 발성영화로 [홍길동전(후편)](감독.촬영 이명우, 조명 최진, 녹음 이필우)37년에 [오몽녀](감독 나운규, 촬영 이명우, 조명 최진, 녹음 이필우)의 일곱편으로 막을 내렸지만 한국영화의 토오키를 발전시키는데 기여한

바는 크다.]

(한국영화전사를 보면, 이필우, 이명우 형제는 "와께지마"(분도)를 내세워 본정3정목(충무로 3가)에 스튜디오를 짓고 경성촬영소의 간판을 달았다. 이때 자본이 없는 이들에게 때마침 제조초기에 있는 일본부사필름에서 필름을 제공해주었다고 했고, "와께지마"(분도)는 민비시해사건의 일원으로 조선총독부로부터 비호를 받고 있는 인물이란 설이 있다.(임병교 증언))


이 시대의 기류

이무렵, 한양영화사가 "차상은"이라는 젊은 부호에 의해서 세워졌다. 그는 이태원에 촬영소를 짓고 "아리 후렉스" 카메라를 일본

에서 사오는 한편 녹음, 현상시설도 갖추었다.

1935년 10월에 발표된 첫번째 작품이 [강건너 마을]로 이 작품은 (감독 나운규, 촬영 이신응, 조명 최진, 현상 손용진, 현천영,

전택이가 신인으로 데뷔한 무성영화이다. 다음해 (36년)에 토오키로 [아리랑 3편)]을 (감독 나운규, 촬영 이신응, 조명 최진) 그리고, 녹음에 일본인 [재하청일, 편집에 양주남)으로 만들어 졌다.)

그밖에 [임자없는 나룻배](32년)로 데뷔한 이규환감독이 영남영화사를 만들고 제작, 기획, 감독을 겸해서 토오키로 [무지개]를

제작했다. 여기에는 촬영에 대구보장웅, 녹음.현상을 일본의 "신흥 키메마"에서 한것으로 되어있다. 

또한 성봉영화사를 차린 제작자 홍찬(뒤에 수도극장),(지금의 스카라)사장이 일본 "신흥 키네마"와 공동으로 이규환 각본, 감독

으로 [나그네]를 토오키로 제작하였는데 촬영에 대구보장웅, 미술, 녹음, 현상, 편집에 이르기까지 일본기술부에 의해서 만들어졌고, 토오키도, 일본어로 발성하여 37년 5월 6일 일본명치좌에서 개봉하고 우리나라에서는 단성사에서 개봉한 작품이다.

그리고 38년에는 일본 "동보"하고, 합작해서 [군용열차]를 만들었다.

여기에는 각본을 일본인 국지성사, 감독은 서광제, 촬영 양세웅, 조명 최진, 미술.현상.녹음은 동보영화사(일본)에서 맡은 어용영화로 동경을 비롯한 일본전역에서 상영되고 서울에서는 약초극장(지금의 스카라)에서 개봉되었다.

그 외에 토오키 영화는 화낭영화사에서(제작 임강원)[청춘부수](감독 홍개명, 촬영 이신응, 녹음 이필우)를 세기양행(제작 정은규)

에서 [파청전](감독 안석영, 촬영 이명우, 녹음 이필우, 현상 류장산)을 37년에 만들었고, (이 작품에서 여배우, 김신재가 데뷔) 38년에는 천일영화사(제작 최강규)가 [도선록](감독 윤봉춘, 촬영 이신응, 조명 최진, 녹음 최인규) 현상은 일본현상소에서 만들었다.

이렇게 해서 우리 영화도, 토오키 시대로 진입하게 된 것이다.

*주, 1912년에 "에디슨"은 "메카니칼시린다."의 증폭기를 발명하므로 발성시대를 열게 했고 <프랑스>는 "유쥐느 보와이에"가

[시네휜(가이스라관)을 사용한 발성영화장치]를 만들었다. 

(독일)은 백열전등을 음성변조시키는 것을 시도하였고, 일본 "키네토휜"(주)은 "에디슨"연구소에서 연수받은 강부방랑가 귀국해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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