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Society of Cinematograp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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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 촬영사

한국영화촬영사 (4)

알렉사65 0 5,672

한국영화촬영사 (4) 

촬영감독 이성춘


. 새로운 영화인들, 등단

토오키시대에 접어든 우리영화는 1935년을 전후해서 새로운 영화인들이 계속해서 등장했다.

촬영에 [양세웅] (35년 춘풍), [황운조] (36년 미몽), [이병목] (39년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김학성] (39년 성황당).

감독으로는 [방한준] (35년 철수차), [박기채] (35년 춘풍), [양주남] (36년 미몽), [신경균] (37년 순정해래), [안석영] (37년 심청전), [서광재] (38년 군용열차), [안철영] (39년 어화), [이영춘] (39년 귀착지), [최인규] (39년 국경).

조명에 [김성춘] (35년 철수차), [최진] (35년 대도전)

* (기록으로는 [김성춘] 보다 [최진]이 1년 앞선 [34년, 전과자]로 쌍벽을 이루다가 수난기를 맞이한 [41년, 복지만리]를 끝으로

 [최진]은 사라졌다.

시나리오에 [최금동] (39년, 애련송)등의 유능한 인재들이 속출했다.

특기할 것은 일본에서 연수받은 영화인들의 귀국이다.

* [김성춘]은 본시 배우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일찌기 [천승좌]란 써커스단을 따라서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다까다.미노루"(고전임)의 권유로 [동아키네마]에 들어가서 조명 기술을 배우고 [제국키네마]와 [신흥키네마]에서 기사로 인정을 받아 조명조장까지 하였다.

일본에서 귀국한 그는 1935년 "이달주"가 세운 [조선중앙영화사]와 공동으로 제작에 들어간다. 자신이 공연을 하고 감독에는 신인

인 "방한준"을 기용, 시나리오까지 맡겼다. 

이 작품이 [철수차] (원제는 "보도의 이단자"로 한것인데 기관에서 제명을 바꾸라는 압력으로 "철수차"로 바꾼 것이다.)

촬영에는 (손용진)(현상.편집 포함), 조명에 (김성춘)이 맡으면서 출연까지 1인 4역으로, 이 작품에 데뷰한 (김일해)와 공연한다.

(맡은 역은 이른아침에 서울거리를 청소하는 살수차의 모범운전사다.) 여기에 처음으로 80kw의 조명기를 사용했다.

이 조명기는 "경성촬영소"에서 처음의 발성영화 [춘향전]을 만들기 위해 일본에서 사온것을 이 [철수차]에서 먼저 사용한 것이다.

그후, 1939년 조선영화사가 제작한 [무정] (기획. 이재명, 감독. 박기채, 촬영.현상.편집. 황운조, 녹음. 최인규)으로 부터 본격적인 조명기사로 활동하면서 조명계의 대부 "김성춘" (무라가미 촌상) 오야지)로 "오야지"란 말이 영화계의 통칭이 된 것이다.

일화 한마디 - "무라가미" 오야지는 칼을 잘 써서 "칼잽이"로 알려진 김성운이었다 한다.)

* "김학성"은 여배우 "김연실"의 동생이다. ("김연실"은 [잘있거라] (27년 감독. 나운규)에서 데뷰하여, "복혜숙" [용중도] (26년)

"신일선" [아리랑] (27년) "전옥" [잘있거라] (27년) "조경이" [숙영낭자전] (28년) "문예봉" [임자없는 나룻배]등과 함께 당시의

유명한 인기여배우의 위치에 있었다.)

"김학성"은 [바다여 말하라] (감독.이규환)의 촬영을 담당한 "이명우"의 조수로 일한 후, 누님(김연실)의 주선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신흥키네마"에서 촬영기술을 연수해 가며, 명치대학에 입학하여 공부할 수 있었다.

구후, 1936년 [미몽] (제작 경성촬영소)에서 감독으로 "황운조" (촬영)와 함께 데뷰해서 크게 신장했다.

"최인규"는 윤봉춘이 감독으로 데뷰한 [도적놈]에서 조감독으로 [도생록] (38년, 감독. 윤봉춘, 촬영.이신웅) [무정] (39년, 감독.박기채, 촬영.황운조)등의 녹음을 담당해 오다가 1939년 천일영화사가 제작한 [국경]으로 감독에 대뷰하면서 (각본, 녹음, 편집 포함) (촬영. 황운조, 조명.미술.류장산) 영화의 본질을 [리얼리티]한 감각으로 표현하여 주목을 끌었다.

[시나리오]의 "최금독"은 동아일보사가 제1회 시나리오 현상모집에서 [환무곡]이란 원제로 당선되어 1939년 극연회/ 영화부에서 서항석의 기획으로 [애련송]이라 개제해서 영화로 만들어졌다.

한편 "전창근"이 중국에서 돌아와 [복지만리] (촬영.이명우)로 감독에 데뷰한다.


. 잃어버린 영화인

풍전의 삶을 살아온 춘사.나운규는 [오몽녀]를 끝으로 세상을 떠난다.

[춘향전]이 최초의 발성영화로 35년에 발표되기는 했으나, 나운규는 그 보다 앞서 [아리랑 3편]을 재촬영하는 사이에 [춘향전]이 완성된 것이다.

불안정하고 무질서했던 수년간의 생활을 청산하고 복귀한 나운규는 모든 사람의 기대를 모으며 [아리랑 3편]에 흙에 대한 사상을 주제로 해서 새로이 출발했다.

그 다음 작품으로 [황무지]를 만들 기획이었으나 춘사의 건강이 허락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오몽녀]로 바꾸게 되었다.

[오몽녀]는 이태준이 쓴 처녀작, 단편소설을 각색한 작품이다. 여기에 이명우가 촬영을 최진이 조명을 맡고, 여배우로 "노재신" (엄앵란의 어머니)이 데뷰하여 윤봉춘, 김일해와 같이 출연했다.

경성촬영소의 마지막 작품이기도 한 [오몽녀]는 극도로 악화된 병약한 몸으로 완성한 춘사의 소작이자 최후의 작품이 되고 말았다. (조선에 있어서도 소위 문예작품이라는 것이 성공한 바 드물어 원작자인 이씨는 시사실에 참열하였거니와 씨로서의 불만도 없지 않았겠지만, 나는 [오몽녀]가 근래에 드문 역작으로 보았고, 여기에서 조선의 영화가 새로 살아 나갈길이 발견되었음을 기뻐하는 바이다. 나씨의 [아리랑]이 조선 영화계에 있어서 새로운 기축을 보였다면은 [오몽녀]는 조선영화라는 것보다도 나씨의 실추되려는 예술적 생명을 다시 살리는 작품으로 볼 수밖에 없다. 첫째 나씨가 이씨의 더구나 처녀작인 [오몽녀]를 제제로 삼은데 예술가로서의 길을 다시 찾아 든 것으로 보거니와 얼마나 이 작품에 자기의 고민을 사랑하였으며, 즉 자기재생에 초조하였는가를 볼 수가 있다.)

(이하락)

경성촬영소에서 촬영을 할 때도 주치의를 대놓고 치료를 받은 춘사는 이 작품이 끝나자 일어날 수가 없었다. 지병은 폐병이었다.

1937년 8월 8일밤. 윤봉춘과 주치의는 그의 임종이 가까움을  느끼면서 바둑을 두고 있었다. 어디에선가 레코드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영화연법(제1집) [나운규 일대기](1939.11.1 등록)]에서 윤봉춘은 다음의 일기를 썼다.

8월 9일

새벽 1시 25분에 나윤규군은 아주 세상을 떠나가 버렸다. 36세를 일기로 어굴히도 갔다. 새벽 6시반에 효자가 올라왔다.

그러나 임종도 못보았다. 슬피 울고 있었다.

8월 11일

아침 10시반에 발인했다. 동리사람들이 많이 구경나오고 영화인들도 많이 모였다. 독립문을 지날 때도 슬펐고 홍제원 고개를 넘을

때는 비도 몹시 왔다. 악사들은 아리랑 곡조를 불러서 더욱 슬펐다. 화장장에서 영결식도 끝났다. 춘사의 마지막 길이었다.


. 처음 열린 영화제

1938년 11월 26일,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영화제가 큰 규모로 열렸다. 조선일보사가 주최한 이 영화제에서는 조선일보사 강당에 전시회가 열렸고 사민당(지금의 시의회의사당)에서는 한국영화의 명화감상회가 열렸다.

전시된 자료는 나윤규의 유작 [황무지] 파혜 임종하기전에 작기작품을 각색한 [상록수]의 원고 그밖에 제작에 사용된 기재, 모형무대, 오픈세트, 화장품, 의상 등을 진열하고 이필우, 이명우, 윤봉춘, 안종화가 안내하고 설명을 맡았다.

영화는 상영이 가능한 작품 45편(무성 33편, 발성 12편)을 골라 일반관중에게 각각 베스트 10을 뽑도록 하고 그중 상위 베스트 3을 상영했다.

<무성영화>

(1) [아리랑] (2) [임자없는 나룻배] (3) [인생항로] (4) [춘풍] (5) [먼동이 틀 때] (6) [청춘의 십자로] 97) [세동무] (8) [사랑을 찾아서] (9) [풍운아] (10) [낙화유수]

<발성영화>

(1) [심청전] (2) [오몽녀] (3) [나그네] (4) [어화] (5) [도생록] (6) [홍길동전] (7) [장화홍련전] (8) [미몽] (9) [아리랑 고개)

(10) [한강]

[한국영화측면비사]에서 


이 행사가 있기 까지 에는 이명우의 힘이 컸다. 조선일보사에서 1936년에 각계의 명사로 구성된 산악회가 백두산을 등반정복하게 된다. 이때 [산악회] 등반의 기록영화를 이명우가 동행해서 촬영했다. 이것이 인연이되어서 이명우는 조선일보사에 영화제 행사를 제안하여 마침내 결실을 보았다.


<수난기>

. 영화계의 통제 

한국을 비롯해서 만주를 침략한 일본은 1937년 중.일 전쟁을 일으켜 북부중국을 점령하고, 마침내 1941년 12월 8일 진주만을 공격하므로서 제2차 세계대전을 유발하고 말았다.

우리민족의 성을 언어를 빼앗으며 극에 찬 일본은 1941년 8월에 조선일보. 동아일보를 폐간하고 탄압정책이 극심해 갔다.

일본은 이에 앞서 1938년 4월 국가총동원법을 발표하여 전쟁을 준비하고 미국과의 통상 조약폐기에 대비해 정부는 생필품 수입을 제한하고 부사 필름에 보조금을 주어 생필름의 자급자족을 추진한다.

1940년 1월 조선총독부는 제령제 1호로 [조선영화령]을 공포했다. 전문 26조 300여항에 달하는 시행령이 따라나왔다.

이것은 전해 4월에 일본에서 법령 제66호로 공포된 [일본영화령]을 그대로 우리에게 적용시킨 것이다.

같은 해 2월, 내무성은 영화업을 시간제로 하고 감독, 촬영, 연기자를 대상으로 한 제1회 기능심사를 했으며, 6월에 일본뉴스 제1호를 만들어 전국에 걸쳐 일제히 상영하도록 강제 실시했다.

조선총독부 도서과에서도 조선군 보도부와 협력하여 먼저 영화인의 통합에 나섰다. 1939년 8월 16일 경성호텔에 전영화인을 모아 놓고 소위 [조선영화인협회]를 발족하여 어용단체를 만들었다.

1940년 2월 11일 일본에서와 같이 [기능증명서발행규정]을 만들어 총독부경무국도서과장 [야마모도]가 위원장으로 위원회가 구성됐다.

기능심사에 따라 영화인등록을 실시한 것은 40년 12월 14일 부터였고 43년 10월 7일에 [조선영화인협회]가 해산되고 사단법인[조선영화주식회사]가 흡수하기까지 계속되었다.

영화인을 통합한 총독부는 제2단계로 영화사 통합에 나섰다.

일본에서 42년 1월에 대일본영화제작(사)가 발족하면서 (신흥키네마, 일활 등을 병합) 영화사는 [송죽], [동보], [대영] 3개사가 되었고 같은해 6월에 [대일본영화협회]가 창설되면서 (영화인연맹, 영화기술협회, 일본영화기계상공회, 감독협회) 등의 명 협회가 해산되었다.

[일본촬영자협회]는 (카메라만 협회와 뉴스 카메라만 협회)가 합병하여 41년 6월에 창립되었다.

이무렵, 이땅에 있는 영화제작자들은 자위책으로 40년 12월 10일 [조선영화제작자협회]가 결성됐다.

([조선영화(주)] 대표 최남주) ([고려영화협회] 대표 이병일) ([한서영화사] 대표 김갑기) ([경성영화] 대표 양촌기, 지성) ([황국영화사] 대표 강류청삼) ([조선예흥사] 대표 서항석) ([조선영화문화협회] 대표 진촌용) ([경성발성영화] 대표 고도김차) ([동양토오키] 대표 이창근)

이들을 주시하던 총독부는 생필름을 배급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여기에 협회는 41년 1월 10일

. 35mm 네가  Film 472,000 Feet

. 35mm 사운드 Film 337,600 Feet

. 35mm 포지 Film 987,500 Feet

. 16mm US 판크로 10,000 Feet의 1년분의 수량을 배급해 줄 것을 탄원했다.

여기에 총독부는 앞으로 [조선내]에 하나의 통합된 영화사로 만들 것을 제시하고 필름 배급을 네가 필름 8,000 Feet, 포지 필름

8,000 Feet로 줄이면서 기존회사의 시설 및 기재들을 사들이는 형식으로 모든 재산을 몰수하기에 이른다.

이떼 일본 영화의 기술과장인 "요고다" (황달전지)를 불러 현물 평가사정을 했다.

이와같이 계획에 의한 총독부는 각본대로 사단법인 [조선영화주식회사]를 만들어 얽혀 있던 영화사들을 폐쇄해 버렸다.

이것이 42년 9월 29일이며, 그뒤에 [조선영화인협회]를 흡수하고 해산시킨 것이다.

이 통합에 [조선영화(주)] (최남주)와 [고려영화협회] (이창용) 등이 반대하고 탈퇴해 버렸다.

새로 탄생한 [사단법인 조선영화주식회사] (조영)는 총독부의 명령에 따라 어용 영화를 만들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게 해서 [조영]은 

. 스튜디오 : (조선문화영화주식회사)

. 카메라 : 바르모형 5태, 아이모 3태

. 녹음기 : 애피아식 3조

. 현상기 : 베르형, 윌리암스형 등 3조 등으로 설비했다.


. 그리고 작품들

조선영화령이 공포되고 [조영]이 창설된 그 년후 동안 이창용. 이세기, 오덕섭 등이 설립한 [고려영화협회] (37년)에서는 39년부터

제작활동에 들어가 제1회 작품으로 [복지만리]를 시작하였으나 이 작품은 [만영]과의 합작으로 만드는 대작인 까닭에 그에 앞서 [수업과] (40년, 감독 최인규, 촬영 이명우), [승리의 뜰] (40년 감독 방한준, 촬영 최순흥), [집없는 천사] (41년 감독 최인규, 촬영 김학성) [풍년가] (42년, 감독 방한준, 촬영 김학성), [복지만리] (41년, 감독 전창근, 촬영 이명우)를 만들었다.

[복지만리]는 전창근이 귀국해서 첫번째로 각본. 감독한 작품이다.

전창근은 일찍 윤백남프로덕션에서 일하다가 "상해"로 건너가서 [양자강]을 연출한 바 있고, 귀국해서 [복지만리]를 만들면서 처음으로 "크레인"을 사용하기도 했다.

[복지만리]를 마친 전창근은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100일간의 옥고를 치러야 했다. (안종화의 측면비사에서)

전창근이 중국 무창대학 출신으로 김구선생이 주도하는 삼일학교에서 교편을 잡은 일이 있어 소위 군관학교 사건의 협의로 체포되었다고 한다.

또한, 일활촬영소에서 수업하고 돌아온 이병일이 이기웅과 함께 세운 "명보영화사"는 [반도의 봄] (41년, 감독 이병일, 촬영 양세웅)을 제작 발표 했다.

그밖에 동아영화사 (최영일)가 [지원병] (41년 감독 안석영, 촬영 이명우), [창고] (원명-들쇠) (41년 감독 이규환, 촬영 양세웅)을 협동예술좌에서 조선예흥사는 [처의 논리] (41년 감독 김영화, 촬영 중산양부)을 한양영화사 (차상은)가 [신개지] (42년 감독 윤봉춘, 촬영 이신웅)을 만들었다.

[조영]이 강압에 의해 생겨난 후로는 거의 "어용영화"로 만들어진다. 그 작품들을 보면,

(영화)

[우러러라 창공] (43년, 감독 김영화, 촬영 양세웅), [조선해엽] (43년, 감독 박기채, 촬영 이명우), [젊은 모습] (43년, 감독 풍전사랑, 촬영 삼포선웅), [거경전] (44년, 감독 방한준, 촬영 김학성), [병정님] (44년, 감독 방한준, 촬영 뢰호명(일본인), [태양의 아이들] (44년, 감독 최인규, 촬영 한형모), [너와 나] (44년, 감독 허영, 촬영 삼미철랑) 등이다.

[너와 나]는 쇠퇴해 가는 일본군부가 초조한 나며지 "내선일체"를 내세워 조선군 보도부에서 내놓은 "국책영화" (국영영화)의 표본이었다.

한국인 인 허조가 일본인 행세만을 하면서 (일명-일수영태랑) 감독을 맡아 배우) (기술자)로 문예봉(한국인) 이향란(안), 소삼용(일본인), 환산정부 (일본인), 삼보랑자 (일본인)를 출연시켜 일체감을 나나태려고한 계획적인 작품이었다.

이밖에 문화영화로는 [나는 간다] (42년, 감독 박기채, 촬영 류장산), [흙에 산다] (42년, 감독 안석영, 촬영 황운조)를 만들어 전국에 무료로 상영하기도 했다.


. 해방전야 (일제의 패망전)

대다수의 영화인들은 [조영]에 가담해 예술인이 아니라 강제동원되어 시키는 대로 하였으나 몇 영화인은 이를 물리치고 고난의 길을 택했다.

옥고를 치른 전창근을 비롯해서 이규환, 윤봉춘, 이귀용, 홍개명 등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조영]은 이들엑게 사람을 보내어 회유할 것을 권유하나 이규환은 완전히 거절했다.

[이미 조선영화가 없어졌는데 내가 가서 뭘 하느냐]고 거절하고 나서 그는 살길을 찾아 만주로 갔다. 이규환은 우연히 조감독시절에 같이 일하던 "기무라" (목두장십이)를 만났다. 

그는 만영의 감독이며 "계민영화부장"이었다. "기무라"가 같이 일하자고 권유한데 대해 이규환은 [조선영화부]를 둔다면 응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이 조건은 만영에서 들어 줄리가 없자 그는 "하르빈"으로 가서 공사판의 막일을 하며 호구를 지탱한다.

윤봉춘은 [신개지]를 마지막으로 솔가해서 의정부에서도 한참 들어간 산간벽촌인 산곡리에 숨어 버렸다. 그는 벽촌유지들을 설득해서 서당을 차리고 "한글"을 가리치고, 짚신, 뜨게질을 삼게 하여 학생수가 늘어나 삼곡학원까지 이르자 일본경찰의 감시는 더해갔다.

이무렵 미군기가 뿌리고간 "삐라"를 보게된 윤봉춘은 정세가 바뀌어 가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동학당"의 투사인 문상(윤득주)이 망명기에 노변초가에서 태어난 윤봉운은 두차례의 옥고를 치른 독립투사요 절실한 기독교인으로서는 일본의 패망이 얼마나 소원이였던가?

한편 이규환은 중노동에 쇠약해진 몸으로 만주에서 서울로 오는 길에 평양에서 이창근을 만나 노자를 얻어 서울에 오니 기다리고 있는 것은 "징집영장"이었다. 그는 다시 평양으로 끌려가 20리 정도 떨어진 곳에서 비행장을 닦는 공사에 징역되게 되었다.

이곳에 위문공연단이 왔다. 그 일행에 "박경구"와 여배우들은 이규환을 붙들고 울음을 터트렸다.

폭악 무도한 일본의 군부는 패전의 길로 접어들면서 1944년, "도죠" 내각이 물러나고 45년 5월, 독일이 연합군에 항복하면서 한층더 퇴색해 갔다. 일본의 "히로시마"(광도), "나가사기" (장기)가 원폭(원자폭탄)에 잿더미가 되자 일본은 손을 들고 말았다.

1945년 8월 8일, 일본천황은 떨리는 목소리로 전세계를 향하여 강복문을 방송함으로서 일본은 패망하고, 8월 15일 한민족은 해방의 날을 맞게 되었다.

애국가를 목이 터져라 부르며 함께 얼싸안고 기쁨에 찬 울음은 이 나라의 광명이요, 이 민족의 줄기찬 저항에서 얻은 자유와 주권의 회복이었다.

우리 영화가 만들어지면서 26년 그동안의 작품은 불과 140여편이지만 우리의 가난한 유산속에서도 한국영화는 정신적인 맥을 이어 왔고, 영화인들의 예술창조는 형식에서나 기술축적에서 많은 기여를 해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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